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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밤, 위대한 개츠비와의 만남

여행

by 앤슬리 2025. 3. 2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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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첫 여행의 두번째날,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위대한 개츠비' 뮤지컬을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뮤지컬 관람은 세 개 이상이라고 호언장담 했는데, 뉴욕에 도착해서는 예산 문제로 반쯤 포기했던 버킷리스트였다. 그런데 숙소가 티켓박스 부근이라는 행운 덕분에, 공연 시작 1시간 전 반값에 오케스트라 좌석을 구할 수 있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뉴욕의 명문대학들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맨해튼 위쪽의 콜럼비아 대학교 캠퍼스를 찾았을 때, 학교 건물의 고풍스러운 외관에 감탄했지만, 내부 투어는 예약제였고 당일 방문자는 받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워싱턴 스퀘어의 뉴욕대학교(NYU)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캠퍼스 입구에서 찍은 사진 몇 장과 대학교 서점의 굿드를 구경하고 쇼핑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학 탐방의 아쉬움을 안고 소호에서 첼시마켓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브로드웨이 티켓박스 앞에서 '위대한 개츠비' 전광판의 매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대학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 무심코 물어본 티켓 가격이 공연 직전이라 절반으로 할인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회에 망설임 없이 티켓을 구매했다.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뉴욕 첫 여행의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학교 내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뮤지컬을 볼 수 있게 된 행운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듯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가 밝아지자, 1920년대 재즈시대의 화려함이 눈앞에 펼쳐졌다. 개츠비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화려한 의상과 세트,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한 음악은 나를 순식간에 그 시대로 데려갔다. 데이지와 개츠비의 복잡한 관계, 그들이 품은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을 읽었을 때는 데이지가 개츠비의 사랑을 외면하고 바람둥이 남편 톰에게 돌아간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물질적 안정을 택한 얄팍한 여자로만 보였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그려진 데이지는 완전히 달랐다. 특히 그녀가 자신의 어린 딸을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에서, 나는 깊은 울림을 느꼈다.
"내 딸이 천사같이 예쁘고, 세상의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랑스러운 바보로만 자라기를..."
데이지의 이 대사와 함께, 그녀의 선택이 단순한 물질적 안정 때문이 아니라 강렬한 모성애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딸에게 안정된 가정과 미래를 주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옆에 앉은 큰애의 손을 꼭 잡으며, 나는 엄마로서 데이지의 선택에 깊이 공감했다. 비록 개츠비에 대한 사랑은 진실했을지 모르지만, 모성은 그보다 더 강한 끌림이었다.
개츠비의 낭만적 꿈보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는 데이지의 모습에서 나는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화려한 파티와 사랑의 열정 뒤에 숨겨진, 이 섬세한 모성의 이야기는 소설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큰애와 나눈 대화가 여행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우리는 데이지의 선택과 개츠비의 꿈에 대해,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모녀가 나눈 이 대화는 단순한 뮤지컬 감상을 넘어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졌다.
그런데 큰애의 표정이 썩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엄마인 내가 느낀 모성애의 전율과 데이지에 대한 이해를 10대의 그녀가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 이 생각은 더욱 확신으로 변했다. 얼마 후 큰애가 '세일즈맨의 죽음' 연극을 보고 돌아와 한참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배우 손병호의 깊은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는데, 옆자리 아저씨의 콧물 삼키는 소리와 절규 같은 울음을 참는 소리, 코 푸는 소리,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 끅끅 거리며 흐느끼는 소리들 때문에 로얄석에 앉아 관람하는 흥을 깨버렸다고 볼멘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옆자리 아저씨의 마음이 어땠는지 훤하게 보였는데 말이다.
그때 나는 뉴욕에서의 '위대한 개츠비' 관람을 떠올렸다. 데이지의 모성에 감동하여 눈시울을 적시던 나의 모습이, 아마도 딸에게는 그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한 옆자리 아저씨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났다. 엄마인 나와 같은 감동과 전율을 큰애가 아직은 공감하지 못했겠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세대와 경험의 차이가 만드는 예술 감상의 간극을 새삼 느꼈다.
그 날 맨해튼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개츠비의 낭만적 열정보다 데이지의 현실적 선택이 더 와닿는 나이가 되었음을 느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 사이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선택하고, 때로는 포기하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딸도, 어머니가 되어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본다면, 데이지를 향한 새로운 이해와 공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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